반응형 전체 글452 중국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지 않은 이유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북한은 혈맹조약을 통해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정권이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국의 존재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반도에 미군은 주둔하는데 중국군은 주둔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 인근까지 진군한 연합군을 피해 중국으로 도주한 김일성은 중국 마오쩌둥을 만나 병력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미국과의 국경을 맞대야한다는 부담감과 자본주의의 중국 유입의 문제로 참전을 결심하고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중공군이 참전 한 후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휴전협정을 통해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사실 주한미군이 남한에 주둔한다는 핑계로 중공군을 북한에 영구 주둔시킬 계획이었다.. 밀리터리 2017. 12. 9. 더보기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투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에 왜인들이 쳐들어 온 난리라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 불리는 비극의 역사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투는 바로 조선 수군이 한산도 인근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박살 낸 '한산도 해전'입니다. 또한 한산도 해전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전투이기도 한데요. 실제 '한산도 해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일본측 함선 73척 중 47척이 침몰하고 12척이 나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한척도 침몰하거나 나포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한산도 해전' 이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저 패전 소식을 듣자 '조선.. 밀리터리 2017. 12. 9. 더보기 ››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5가지 명량대첩이란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하고 빛나는 승전으로 정유재란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5가지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수군의 군율과 신뢰의 리더쉽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출전에 앞서 조선 수군들에게 조금이라고 군령을 어기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렸습니다. 당시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조선수군 역시 필사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인데요. 명량해전은 누가봐도 조선수군의 패배가 분명했고 심지어 이순신 장군 조차도 기적(천행)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수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한 것은 조선수군의 떨어진 사기를 다시 올리게 만든 이.. 밀리터리 2017. 12. 9. 더보기 ›› 한국인들이 반드시 배워야하는 중국인들의 보복습관 한국과 중국은 최근 외교적인 문제로 양 국간의 문제를 해결하며 얼어붙었던 한-중관계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사드보복이 시작되면서 중국에 진출해있던 한국기업들과 한국인들은 엄청난 피해를 받아야만했는데요. 한국인들이 반드시 배워야하는 중국인들의 보복습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이 사드를 전면 배치한다는 발표를 하자 중국은 이에 반발하여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감행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정부 자체적으로 한국기업에 대한 패널티를 부여하여 했고 중국인들은 한국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시작했는데요. 그 결과 중국 대도시에 있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국상점을 비롯한 식당들은 문을 대거 닫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드 보복으로 인해 한국인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중국에서 하던 사업을.. 밀리터리 2017. 11. 24. 더보기 ›› 임진왜란 당시 17만에 육박하던 조선군이 3만 명으로 축소 된 이유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은 광해군의 의병 정책으로 인해 조선 정규군이 17만 5천 명에 달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정규군 17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급속도로 감소 된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17만에 육박하던 조선군이 3만 명으로 축소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치 전투를 비롯한 진주성 방어전에서 승리한 광해군의 분조는 호남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 편성과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조직을 정규군에 편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고 명나라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수세에 몰린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측에 강화협정을 제안했고 명나라측은 일본의 강화협정에 수응하여 휴전기에 접.. 밀리터리 2017. 11. 23. 더보기 ›› 반응형 이전 1 ··· 68 69 70 71 72 73 74 ··· 91 다음